본문 바로가기

Memory

영국이 삼촌을 기억하며

2023년 4월 5일 식목일, 나의 사랑하는 막내 외삼촌, 영국이 삼촌이 산에 뿌려지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카톡으로 영국이 삼촌 장례를 마쳤다고, 일부로 연락 안 했으니 엄마 마음 가라앉을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며 메시지를 보내셨다.

저 세상에 간 사람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엄마의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

다행히 엄마는 씩씩했다 언제나 늘 그래왔듯.

 

영국이 삼촌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마도 알코올중독자, 심신미약자,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가까이서 보면 늘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정말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통틀어 단연 가장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순수한 삼촌은 늘 사람들에게 이용당했다.

대포폰, 대포차 등을 만드는데 명의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일을 하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일은 태반이었다.

건설현장에서 노가다일을 주로 했었고 몇 년씩 고기잡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기도 했다.

고된 노동으로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고, 몸은 작지만 단단하였고, 손은 사람의 것이 맞는지 한번 더 보게 될 정도로 굳은살로 뒤덮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알코올에 중독되었던 것 같다.

내가 걸어 다니던 먼 기억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삼촌의 손을 잡고 있었고 삼촌의 반대편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있었다.

우리의 나이차가 많이 나지 않는 걸 감안하면 십 대 때부터 그랬으리라 생각이 된다.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할 즈음 우리는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 시절, 첫째 이모 (우리는 왕이모라고 불렀다)가 계신 철원까지 가려면 버스를 3번인가 갈아타며 하루종일 가야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대뜸 다니곤 했다.

이유는 단순히 첫째 이모가 우리에게 밥을 맥이고 싶어 했고 우리는 그 음식이 좋아서였다.

지섭이네를 만나러 안양과 신림사이에 있는 관악산을 그저 무심히 걸어서 넘어다니기도 했다.

 

내 키가 삼촌과 비슷해질 만큼 성장했을 즈음, 매일 삼촌을 챙기는 이모들을 대신해 나는 술 취한 삼촌을 억지로 끌고 다니며 건강검진을 받기도 했었다.

수십 년 동안 소주로 밥을 대신했는데도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간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고등학교 1학년때였나, 같은 반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시흥사거리에서 순댓국집을 하셨었다.

우리는 몇 번인가 그곳에 가서 나는 순댓국을 맛있게 먹고 삼촌은 소주를 맛있게 먹었다.

배실배실 웃으며 엄마와 이모들에게는 비밀이라며 남은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어보지만 벌게진 얼굴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엄마를 포함한 많은 누나들이 삼촌을 걱정하여 굿을 해보기도 하고, 여자를 만나보라며 필리핀으로 여행을 보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몇 번인가 정신병원에 보내보기도 했지만 또 금방 마음이 약해져서, 또는 삼촌이 거부해서, 얼마 있지 못하고 나오곤 했다.

 

그런 삼촌이었지만 나보다 열댓 살 많은 그는 나에게는 아직 없던 경제력이라는 것이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있다 오면 주머니에서 두둑한 만 원짜리 지폐다발을 보여주곤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나 멋져 보였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버릴 기세로 시장통을 돌아다니곤 했다.

 

사고를 친 일도, 가족들에게 폐를 끼친일도 많지만 나는 그런 삼촌이 밉지 않은 이유들이다.

말이나 행동, 생각 그 어디에서도 악의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악의가 존재하는 위험한 세상이 아무 죄 없는 한 사람을 미련한 바보로 몰아넣은 것 같다.

 

화성 함백산 추모공원에서 화장을 했고 재는 산에 뿌렸다고 하니 이제 세상 속에서 존재하던 어떤 아픔은 잊고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기억할게 삼촌. 사랑해.

'Mem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루즈 여행  (1) 2023.10.02
우리집 남자들  (0) 2023.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