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골에서 지내던 아주 어린 시절, 우리 할아버지는 나를 몹시 이뻐했다.
마을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족들조차 피하던 소위 호랑이 할아버지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손자인 나에게 큰 사랑과 기대를 주셨다.
당신이 평생은 지내신 그곳에서, 나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당신만의 세상과 시각을 보여주셨다.
읍내에 나가면 이발소, 사진관, 그리고 알사탕을 팔던 구멍가게를 들르곤 했다.
종이와 연필을 들고 지리산 산자락에 올라 앉아 맞은편 산자락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기도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 지내셨을 때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매일같이 술을 드시던 모습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시골집은 전통 한옥가옥이어서 가마솥 딸린 주방이 한쪽 끝에 있었고 화장실은 마당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
심심한 내가 주방에 기웃거리면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시기도 했다.
"주방은 여자들이나 들락거리는 곳"이라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집안일은 할머니와 엄마가 했고, 할아버지는 남들과 다른 세상에 있는 듯 알 수 없는 책을 읽으셨고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시곤 했다.
가족 간의 유대감, 감정 표현등이 없었으니 그 관계가 좋을 리 없고, 할머니조차 할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멀리하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나를 사랑했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억지로나마 변호를 해보고 싶다.
그는 당당하고 힘이 세고 고집도 세고 인물도 좋은 젊은이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몇 장남은 흑백사진이 있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난 시대적 상황은 일제 식민통치하에 있었고, 광복 후에는 군사 독재정권하에 자랐다.
폭력을 직접적으로 당한 세대에게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무릎 꿇고 빌어 내 목숨을 건지는 일은 의미 없을 수 있지만 내 가족을 위한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뒤틀리고 뒤틀린 몸과 마음을 자유의 소중함을 잊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과거, 여성들이 억압을 받았다고들 얘기하지만, 남성들의 억압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남성들에게 강인함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무관심하다.
젊은이는 강제로 군사력에 동원되고, 그들의 고향으로 작전을 나가서 폭력에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
1948년 시골 어느 평범한 새벽, 집집마다 들이닥친 군홧발은 자고있던 젊은 남자들을 끌고 가 총살을 했다.
그중 한 분이었던 증조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탑골마을에 살던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학살당하셨다.
그 이후로 마을의 여자들은 군복만 봐도 몸을 떨었다고 한다.
환경이 사람을 결정한다고도 하지만, 내가 닮기 싫은 모습은 그 반대의 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미워했고, 할머니를 지켰고,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그 사랑의 방식에 얼마나 행복하신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모습은 확실히 볼 수 있다.
사랑을 측정할 수 있다면, 행복을 측정할 수 있다면, 엄마는 할머니보다 높은 점수를 받으리라 믿는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방향을 돌려 나를 바라보면 어떨까.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란 평생을 연습해도 주의력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고집을, 아버지에게서 낭만을 가져다가 섞어 이기심을 만들었다.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억압 속에서 자란 나에게 책임감은 끊어낼 수 없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분노가 숨어있다.
사랑과 낭만을 얘기하지만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내가 좋아야만 하는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이는 괴로운 일이다.
예를 들어, 내가 요리도 못하는 20세기 남자로 자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나야만 한다.
어린 시절 형성된 자아를 바꾸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이대로 살고 싶은 나를 유지하는 데에는 더욱 큰 에너지가 들 수도 있다.
세상을 향한 모험심과 자신감이 충만한데도, 나를 바꾸는 용기는 부족한 심리는 내가 믿어왔던 이상적인 삶에서 그 균형이 무너지면 어디서부터 다시 쌓아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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